버스 안에서는 내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. 오로지 인터뷰에서 떨어지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.
몇 번이고 주소를 확인하며 두리번거린 후에야 집을 찾아냈다.
캐나다 대부분의 집들이 그렇듯 잔디가 예쁘게 깔려 있는 깨끗한집이었다.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서 벨을 눌렀다. 잠시 후 문이
열렸고 키가 큰 남자가 나를 맞았다.
“당신이 옥란이에요?”
“예.”
“어서 오세요. 저는 짐이라고 합니다.”
할머니의 막내 아들이라는 바로 그 노총각이었다. 키가 거의 2미터는 되어 보였다. 일단 그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. 그곳에는 할머니와 샤론이 앉아 있었다. 할머니는깨끗한 하얀 실내화를 신고 소파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.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은은한 품위가 배어 나왔다. 날 바라보는할머니의 시선은 부드러웠지만 뭔가 어두워 보였다. 나는 할머니의모습에서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온 흔적을 엿보았다. 인생에 있서미련과 아쉬움이 적잖게 남아 있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.
짐이라는 남자는 얘기를 나누는 우리를 지켜보며 미소만 짓고 있었다. 그는 예상보다 훨씬 인상이 좋고 점잖은 사람이었다. 보통 키에 배가 좀 나오고, 머리가 서서히 벗어져 가고, 스넥 봉지를 든 채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그런 모습일 줄 알았는데..... 짐은 겸손하며 다정해 보였다.
우리의 이야기에 짐도 가끔은 끼어들었다.
“몇 년 전에 에드먼턴에서 살았는데, 불고기를 먹으러 ‘불고기 하우스’라는 한국식당에 친구랑 함께 갔었어요.”
할머니의 식구들과 얘기를 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평온함이 깃들고 있었다. 할머니는 뒤뜰에서 따 온 블루베리를 냉동시켜 놓았다면서 한 봉지를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. 나는 인자한 그모습에서 어쩜 이분이 날 원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.
“언제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?”
할머니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사실 고용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싶어 샤론에게 물어봤다. 그러나 샤론의 대답은 냉정했다. 네 군데의 직업소개소에서 1명씩 후보자를 보내 오니까 아직 3명을 더 인터뷰한 후에 최종적인 결정을 하겠다는 거였다. 꼭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살 것처럼 살갑게 대하더니 원래의 계획에서 조금도 벗어나지않는 이들의 태도에 서운함까지 느껴졌다.
샤론과 짐은 계단을 내려와 앞뜰까지 배웅을 해 주었고 할머니는커다란 위층 유리창을 통해 떠나는 나를 내려다 보았다. 그곳에서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참 좋았다.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이 밤거리를 밝게 해 주고 있었다. 집들을 지나니 큰 도로가 나왔다.
‘영어 잘하고 음식 잘 만드는 후보가 있으면 그 사람을 쓰겠지,뭐가 아쉬워 나를 다시 부를까.’
김씨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.
‘그저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자. 그러니 실망 같은 것 하지 말고부지런히 다른 일을 찾아보자.’저녁이라 버스 안은 한산했다. 운전사와 나, 그리고 인디언으로보이는 남자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. 스코트로드에서 내려 지상철인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콜롬비아 역까지 온 뒤 코퀴틀람 가는 버스로 다시 갈아탔다.
면접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김태식 씨 가족과 늦은저녁을 먹었다.
나는 김씨네 가족들에게 조금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단히 설명하고, 그곳에서 가져온 블루베리 봉지를 내놓았다. 아이들과 나는 아직 채 녹지 않는 블루베리를 꺼내서 아이스크림 위에 얹어 먹었다. 차가운 블루베리가 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할머니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 했다. 인터뷰를 한 지 1주일이 지나가는데도 연락은없었다.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실망스럽지도 않았다.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직업소개소의 필리핀 남자 스탠을 찾아
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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